“우리는 왜 5·18을 기억해야 하는가?”
매년 5월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5·18 기념식은 단순한 추모 행사를 넘어,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이들을 기억하고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시간입니다. 오늘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치열하고 아팠던 항쟁, 5·18 민주항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1. 5·18 민주항쟁이란?
5·18 민주항쟁(광주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광역시에서 벌어진 시민들의 민주화 운동입니다. 당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군사 쿠데타에 맞서, 광주 시민들과 학생들이 계엄령 철폐와 민주정부 수립을 요구하며 일어난 대규모 저항이었습니다.
주요 요구 사항:
• 비상계엄 해제
• 전두환 등 신군부 퇴진
• 유신헌법 폐지 및 민주헌법 제정
• 언론 자유 보장
2. 시대적 배경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10·26 사건) 이후 권력 공백이 발생합니다. 그 뒤를 이어 최규하 대통령이 취임했지만 실권은 없었고,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12·12 군사반란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국민들은 유신 독재가 끝나고 민주화가 시작될 것을 기대했지만, 신군부는 오히려 전국에 비상계엄을 확대하고, 야당 정치인과 학생 운동가, 언론인들을 체포하면서 자유를 억압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국적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는 전남대 학생들과 광주 시민들이 있었습니다.
3. 항쟁의 전개 과정
■ 1980년 5월 18일
전남대학교 학생들의 시위를 막기 위해 **계엄군(공수부대)**이 광주에 투입됩니다. 학생과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진압, 폭행하고 체포하는 모습에 분노한 시민들이 합류하면서 시위가 본격화됩니다.
■ 5월 19~21일
계엄군의 폭력에 맞서 시민들이 자발적인 시민군을 조직합니다. 도청 앞 집결, 시민군 차량 확보, 군 무기고 탈취 등의 활동을 통해 저항이 체계화됩니다. 그러나 계엄군은 헬기 사격, 기관총 발포 등 무차별적인 무력을 사용하며 수많은 사상자를 발생시킵니다.
■ 5월 22~26일
광주는 외부와 완전히 고립된 상태였지만, 시민들은 자체적으로 질서를 유지하며 자치 공동체를 운영합니다. 시민군은 무기를 반납하고 대화를 요구하지만, 정부는 무력 진압을 결정합니다.
■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중심으로 마지막 진압 작전을 벌여 시민군을 무력으로 제압합니다. 이로써 10일간의 항쟁은 막을 내립니다.
4. 희생과 그 후
5·18 민주항쟁으로 공식적으로는 200여 명, 비공식 추산으로는 수백 명 이상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고, 수천 명이 부상하거나 구속되었습니다. 특히 계엄군의 고문과 성폭력, 헬기 사격, 암매장 의혹 등은 오랫동안 밝혀지지 않고 은폐되었으며, 이에 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지금까지도 계속 요구되고 있습니다.
5. 5·18의 역사적 의의
5·18은 단순한 지역 사건이 아닌,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전환점이 된 사건입니다.
• 시민들의 자발적인 민주 저항
• 공권력의 폭력과 국가 범죄에 대한 문제 제기
• 이후 1987년 6월 항쟁의 동력이 되었으며,
• 오늘날까지 민주주의·인권·평화의 상징으로 남아있습니다.
6. 오늘날의 5·18
• 1997년: 5·18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됨
• 2011년: 5·18 기록물이 UNESCO 세계기록유산 등재
• 광주 5·18 민주묘지: 국내외 민주 인사들의 참배 장소로 자리잡음
• 2023년: 국회 5·18 유족단체 및 학생 단체 초청 행사로 전국 확대 추모
7. 5·18을 기억하는 우리의 자세
5·18은 과거의 비극이자 현재의 교훈입니다.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것은 특정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민주주의를 위한 일입니다.
기억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연대입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그 피는 바로 광주 시민들의 피였고, 우리는 그 희생 위에 서 있습니다.
매년 5월, 그날을 잊지 않기 위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유입니다.